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의 감동을 받았던 애니메이션 UP!
아이들이 보는 것을 무심히 옆에서 지켜보다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었던 나를 기억한다. 전개 부분에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이지만,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 그 장면이 좀체로 잊혀지지가 않는다.
요즘은 30년 후 나에게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하는 상상을 자주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속을 스치는 것이 바로 그 애니메이션의 장면이다. 누구나 굴곡진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인생의 종착역을 맞이하겠지만 가보지 않은 길인 이상 나 자신의 종착역이 무척 궁금한건 어쩔 수 없다.
기나긴 타향살이를 잘 견디고 우리 부부가 은퇴했을 무렵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과연 그때 이곳에서 살고 있을까조차 궁금하다.
호주는 참으로 축복받은 땅임에는 틀림없다. 이 광할한 영토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해변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최고는 아닐지라도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주는 이방인인 우리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는 아니다.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 조차도 많은 노력과 돈을 필요로 한다. 영주권에 관한 사연이라면 책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발에 채일만큼 많을 것이다. 어렵게 영주권을 손에 넣었더라도 사회에서 또 다른 생존의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그것도 언어라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도구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마치 손을 묶인 채 상대방과 권투를 해야 하는 셈이다.
호주는 참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긴 하다. 특히 초기 정착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호주에서 살아 남으려면 집을 살 돈 정도의 큰 돈을 가지고 오지 않는 이상 어마어마한 생활비를 지출해야 하므로 복지 혜택만으로 살아 남을 수는 없다. 살아 남는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난관이 남아 있다. 바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은퇴 후의 삶이다.
그나마 한국에 비해 호주에서의 삶이 가지는 장점이라면, 아이들 교육비나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이 크게 낮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사람 나름이고 여기 사는 한국인이라도 아무래도 한국적인 사고 방식에 크게 얽매일 수 밖에 없긴 하지만 호주의 평균적인 모습으로 보자면, 대체로 사교육이 거의 없고 학자금을 국가에서 론을 해주며, 성인이 되면 독립해서 살고, 결혼이나 집 장만도 본인이 책임을 지므로 이에 대한 부모의 부담은 상당히 낮긴 하다. 여기에 지출되는 비용을 은퇴 비용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평균적인 호주를 말한 것 뿐이다. 여기서도 여유있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하이스쿨 보내고, 대학교 등록금 대 주고, 결혼할 때 기프트로 재산을 주기도 한다. 어쨌든 평균적인 삶을 보자면 아이들을 하이스쿨까지 키워주면 더 이상 부모는 금전적으로 부담이 없어진다.
얼마전 출퇴근길 라디오에서 듣다보니 최근의 한 설문조사에서 호주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조기 은퇴라고 한다. 불과 한 두 세기 이전에는 큰 땅과 주택이었다고 한다. (보통 에이커리지라고 많이 부른다.) 호주가 세계에서 가장 큰 주택 사이즈(대지 포함)를 가진 나라라고 하니 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호주인들의 관심사도 조기 은퇴로 옮겨가는 것이다.
호주에서는 은퇴를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 여기에는 주택에 묶여 있는 돈, 현금, 수퍼연금 그리고 노령층에 나라에서 제공하는 은퇴연금이 포함될 것이다. 이 금액으로 자기 삶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으면 은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호주인들이 모기지로 25-30년 정도를 갚고 있으니 은퇴 시기가 되면 온전한 집이 남아 있을 것이고, 30년 정도 부어온 연금이 10-30만불 정도 될 것이다. 여기에 격주로 들어오는 노령 연금을 더해서 개인이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사륜구동에 캐러밴을 붙여 3개월이고 반년이고 멋지게 여행을 하는 노년을 꿈꾸지만 현실은 누구나 그런 노년을 맞을 수는 없다. 고민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거지가 없는 호주이긴 하지만 캐러밴 파크나 정부 주택에서 노년을 맞고 싶지는 않다.
내가 시드니에 살 때 바로 길 건너편 앞 집에 한국인 노부부께서 사셨다. 우리가 막 이사왔을 때 그 분들은 며칠 전 동시에 은퇴를 하셨다고 했다. 각각 30년과 25년 정도를 회사 생활을 하셨고 매우 아름다운 집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계셨다. 은퇴 후 한달은 동유럽 여행을 가셨기 때문에 한 동안 뵐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퇴직 보너스로 장만하신 무척이나 고가의 SUV를 타고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셨다. 그 분들의 삶을 보고 나도 살짝 욕심이 더 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집에서 추억이 어린 물건들을 꺼내보고, 잔디를 깎으며 정원을 돌보고, 야외의 티테이블에 앉아 와이프와 담소를 나누며 가끔 멋진 캐러밴을 끌고 호주 전역을 여행하는 은퇴 후의 노후를 소원해본다. 그래 가끔은 세 녀석들이 아이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와서 북적북적한 집을 만들어 주는 것도 참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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