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감사한 것들

hiaaron 2011. 3. 25. 21:27
호주에서 산지도 딱 9개월이 되었다. 9개월 전 바리바리 짐을 싸서 공항을 헤매던 것이 엊그제인데 벌써 1년이 가까워진다.
거주여권으로 바꾼 덕에 인천공항에서 심문 아닌 심문을 받았던 것도 생각난다. 사실 많이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죄를 진 것도 아니요, 국가에 폐를 끼친 것도 아니요, 더욱이 세금 한푼 안 낸적 없는 선량한 시민인데 단지 이 나라를 떠나는 여권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구석진 사무실로 불려가 신고를 해야 했다. 잘은 내용이 기억 안나는데 주민등록 말소 관련한 신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여권엔 선명하게 도장이 꽉 찍혔다... "최초 이민 출국" 나에게는 마치 그 옛날 죄수에게 찍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난 아직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남의 집에 잠시 얹혀 살다가 처음 렌트를 얻어서 나갔던 날을.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날씨가 좋은 나라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 며칠 추웠던 것은 뼈속 깊이 잊혀지지 않는다. 겨울이래봐야 겨우 5도 근처까지 내려오는 것이 다지만 호주의 집들이 워낙 날림으로 지은 집들이라 바깥 온도보다 집 온도가 더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컨테이너가 도착하기전이라 비행기로 실어갔던 온수매트 하나를 제일 작은 방에 깔고 네 가족이 웅크려 2주 가까이 지내야했다.

지난 9개월이 어쩌면 그리도 빠르게 지나갔는지 아직도 한국에서 지내던 일들이 너무도 생생하다..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회사 동료들..

요즘은 삶이 많이 익숙해졌다. 호주라는 나라에도 익숙해지고 회사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 나가고 있다. 우리 가족은 시드니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이곳 브리즈번에 정착한다.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고, 친구들도 사귄다. 특히 우리 딸내미는 올해 처음 브리즈번에서 Prep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단체 생활이 무척 불편하고 어렵기도 할텐데, 특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무척 답답하기도 할텐데 잘 적응하는 듯하다. 감사한 일이다.

누가 나에게 왜 호주에 이민을 왔냐고 물으면 사실 아직도 많이 머뭇거린다. 사람들은 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한국에선 뭐했냐, 지금은 무슨 일을 하냐, 어디 사냐, 왜 좋은 직장 두고서 이민 왔냐.. 등등.. 솔직히 제대로 답변할 자신이 없다. 호주가 좋아서란 답변은 매우 궁색하다.. 난 이민 오기 전 한번도 호주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사실 매우 불성실한(?) 답변이지만 특별히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머리가 굵어지면서 생긴 방랑벽, 뭐든 못하겠냐는 다소 무모한 자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날 "아 이민가야지"하고 이민법무사 찾아가서 상담하고 그 다음주에 서류 내고 3개월 지나서 영주권이 나왔다.. 길게 말하자면 끝이 없지만 결론은 운이 좋아서 쉽게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차마 안 갈 수가 없어서 오게 된 것이다.. (매우 불성실한 답변.. ^^)

이 세상엔 참 감사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

남들은 몇년을 걸려서 때론 엄청난 돈을 들여서 받아야 하는 영주권을 내가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니고 정말 운이 너무 좋아서 빠른 시간 내에 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도와 주었다는 것.
호주와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특히 호주 땅에서 가장 처음 만난 임시 숙소 주인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
비교적 백수 생활을 적게 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
월급을 받으며 세금을 내서 이 나라에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가족과 다소(?)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

세상에는 온통 감사할 것들이 가득하다. 단지 내가 하루하루 쉽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심코 지나쳐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제 앞으로 펼쳐질 날들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어떻게 이 땅에서 그려나갈지가 나에게 남은 숙제일 것이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